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스티야 왕국 (문단 편집) === [[엔리케 1세]]와 [[페르난도 3세]] === 1214년 10월 5일, [[알폰소 8세]]는 쿠티에르-무뇨스에서 열병으로 사망했고 당시 10살이었던 아들 '''[[엔리케 1세]]'''가 카스티야 왕위에 올랐다. 알폰소 8세는 죽기 전에 아내 엘레오노르에게 [[섭정]]을 맡겼지만, 엘레오노르마저 남편이 죽은 지 24일 만에 사망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장녀 [[베렝겔라]]에게 엔리케 1세의 섭정을 맡겼다. 그러나 베렝겔라의 섭정은 엔리케 1세의 가정교사를 맡은 알바로 누녜스 데 라라 백작의 방해를 받았고, 베렝겔라는 카스티야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인 라라 가문의 압박에 못 이겨 엔리케 1세의 후견인 자리를 그에게 넘겼다. 알바로 누녜스는 1215년 엔리케 1세와 포르투갈 국왕 [[산슈 1세]]의 딸 마팔다의 결혼을 주선했다. 두 사람의 약혼식은 부르고스 시에서 거행되었지만, 1216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두 부부가 사촌 지간이니 교회법에 어긋난다며 불허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에 알바로 누녜스는 레온 국왕 [[알폰수 9세]]의 딸 [[산차]]와 그의 결혼을 주선해,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을 통합시키고 베렝겔라의 아들 [[페르난도 3세|페르난도]]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려 했다. 1217년 6월 6일, 엔리케 1세는 팔렌시아의 에피스코팔 궁전에서 또래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지붕 위에서 떨어진 타일에 머리를 직격당해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알바로 누녜스는 엔리케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부르고스와 두에냐스 사이에 위치한 타리에고 데 세라토 마을에 그 시신을 숨겼다. 그러나 베렝겔라가 이 사실을 눈치채고 두에냐스 시를 점거하고 엔리케 1세의 유해를 확보한 뒤 팔렌시아와 부르고스의 주교들을 보내 유골을 관리하게 했다. 훗날 엔리케 1세의 유해는 데 라스 우엘가스 데 부르고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베렝겔라는 알폰수 9세가 엔리케 1세가 사망하면서 카스티야 왕실의 혈통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카스티야 왕위를 차지하려 들 것을 우려했다. 그녀는 일단 엔리케 1세가 죽었다는 것을 숨기고 알폰수 9세에게 아들 페르난도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아들이 올 때까지 임시로 카스티야 여왕을 맡았다. 알폰수 9세가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채 페르난도를 보내자, 베렝겔라는 곧바로 엔리케 1세의 사망을 대내외에 공개한 뒤 아들 [[페르난도 3세]]를 카스티야 국왕으로 옹립했다. 알폰수 9세는 알바로 누녜스의 조언에 따라 라구나 데 두에로, 토르케마다, 토르도마르를 거쳐 부르고스로 향하면서 각지를 약탈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민중들이 강한 적의를 드러내며 곳곳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병력이 계속 소모되자, 그는 부르고스를 공략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레온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돌아가는 동안 팔렌시아를 통과하면서 기론과 메네세스 가문의 영지를 초토화했다. 한편 페르난도 3세는 아빌라와 세고비아, 라라, 팔렌시아 일대의 지배권을 회복하고 그곳의 병력을 차출해 1217년 8월 중순 부르고스에 입성해 민중의 환호를 받고 8월 31일에 부르고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1217년 9월 페르난도 3세가 부르고스를 떠나 팔렌시아로 향했을 때, 알바로 누녜스의 형제 페르난도가 레빌라 발레헤라에서 매복 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격퇴되었다. 알바로 누녜스는 에레루엘라 데 카스티야레라에서 또다른 매복 공격을 시도했지만, 수에로 텔레스 데 메네세스가 이끄는 적군의 역습을 받고 사로잡혀 바야돌리드로 호송되었다. 그는 알라르콘, 카네테, 타리에고, 아마야 및 빌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 등 자신이 통제하는 요새들을 모조리 헌납해야 했다. 1217년 11월, 알폰수 9세는 풀려난 후 레온으로 망명한 알바로 누녜스와 함께 페르난도 3세와 만나 휴전 협정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알폰수 9세는 알바로 누녜스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1218년 봄 카스티야를 재차 침공해 메디나 데 리오세코 인근의 발데네브로 요새를 공략했다. 페르난도 3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로베 데이스 데 하로, 알바로 디아스 데 카메로스,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데 빌라마요르를 파견해 레온 왕국을 침공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알폰수 9세와 라라 가문에게 격퇴되어 카스트레욘 데 라 페냐 요새로 퇴각했다. 알바로 누녜스는 이 요새를 포위하고 공성전을 이끌던 중 갑작스러운 중병에 걸려 사망했고, 요새에 갇혔던 카스티야군은 적이 지휘관의 사망으로 어수선해진 틈을 타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강경파였던 알바로 누녜스가 사망한 뒤, 알폰수 9세와 페르난도 3세는 베렝겔라의 중재에 따라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양자는 1218년 8월 26일 토로 협약을 체결했다. 페르난도 3세는 아버지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했고, 알폰수 9세는 빼앗았던 영토를 되돌려주고 다시는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 일로 부자간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토로 협약이 체결되면서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의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카스티야 왕국의 강력한 귀족 가문인 라라 가문은 여전히 페르난도 3세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는 이들을 한편으로는 무력으로 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협하면서 화해를 도모하는 한편, 부르고스와 팔렌시아 등 자신을 지지하는 지역의 귀족 및 주교들을 중용하여 라라 가문을 견제했다. 또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강력한 외국과 결혼 동맹을 맺기로 했다. 1219년, 그는 어머니 베렝겔라의 조언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손녀이자 슈바벤 공작 필리프의 딸인 슈바벤의 베아트리스와의 혼사를 추진한 끝에 성사시켰다. 1222년, 페르난도 3세는 어머니 베렝겔라의 권유에 따라 남동생 알폰소를 최근에 사망한 몰리나 백작 곤살로 페레스 데 라라의 상속녀인 마팔다와 결혼시키고 라라 가문과의 갈등을 종식하기 위한 자프라 협정에 서명했다. 이리하여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 왕국의 강력한 귀족 가문인 라라 가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또한 1224년에는 여동생 베렝겔라를 [[예루살렘 왕국]] 국왕 [[장 1세(예루살렘 왕국)|장 1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알폰수 9세가 포르투갈의 테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녀 [[산차]]를 장 1세와 결혼하려는 시도를 저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